“강 기자,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 어떤 놈인지 알아?”
선뜻 대답을 못 했다. 눈 부라리던 형사는 결국 스스로 대답했다. 아련한 기억 속의 일, 그러나 노련한 형사의 얘기 중 그 대목은 아직 내 뇌리(腦裏)에 선명하다.
서울 여대생 박상은 양 살인사건 담당 강남경찰서 곽노명 형사계장, 수사본부인 파출소 숙직실서 새벽 쪽잠에 빠진 풋내기 사건기자를 살짝 깨웠다. 고참 형사와 기자만 태운 차는 사체(死體) 부검장을 향했다.
기 싸움 치열한 그들, 미운 정 쌓여 우정이 됐다. 해외연수 1세대 미모의 여대생의 의문의 죽음, 온 세상 관심이 다 그 사건(1981년 9월) 쏠린듯했다.
처참, 잔혹. 그의 배려로 처음 본 사체 부검(剖檢)은 대단한 경험이었다. 소주 두어 잔에 해장국 한 그릇을 그런대로 먹어치운 기자에게 형사는 쓸만한 녀석이라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.
이제 속마음도 주고받는 사이가 된 것인가? 인생도, 권력도 뜬 구름 같더라는 식의 개똥철학이 밥상 위 아래로 어지럽게 오갔다. ‘제일 나쁜 놈’ 얘기는 그 중 한 대목이다.
“남 잡아넣어 달라고 청탁하는 놈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야. 내 형사 인생 걸고 장담해! 강 기자도 앞으로 이런 저런 말도 많이 듣고, 청탁도 받게 될 거야. 그 때마다 이 말 생각해. 잊지 말라고...”
‘잡힌 놈 풀어 달라’는 청탁은 인지상정(人之常情)이다. 물론 무리한 일이지만, 그럴(그런 부탁을 할) 수도 있다고 본다. 그러나 ‘어떤 놈을 잡아넣어 달라’는 청탁은 가장 질이 나쁜 청탁이다. 인간적으로 보더라도 그럴 수가 없다.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다. 죄 지은 놈은 안 그래도 다 잡혀가게 돼 있다. 그의 말은 대충 이런 뜻이었다.
인생 대선배지만 형사인 그에게 기자가 기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. 그 자리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공감을 표시했던 것 같다. 그러나 선악(善惡)의 판단 기준과 관련한 이 ‘실질적 척도(尺度)’는 언론인으로서의 내 발자취에 꽤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.
‘칭찬해 달라’ ‘평가해 달라’는 얘기는 그럴 수도 있다고 보지만, ‘남을 험담해 달라’ ‘조져 달라’는 얘기에는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을 터. 인지상정에도 걸맞지 않은 이런 청탁 속에 혹 검은 칼날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한 번 더 궁리하는 것이다. 그리고 그 후 인생 바다를 꽤 오래 건넌 지금, 그 말에 새삼 수긍한다.
고참 김재호 판사가 후배 법조인(法曹人) 박은정 여검사에게 전화로 기소청탁(起訴請託)을 했다, 아니다 매일 시끄럽다. 그 판사의 부인은 서울시장 출마까지 했던 정치가다.
권력 엘리트 부부와 여검사, 단역쯤으로 ‘초라한’ 기자도 한 사람 출연하는, 블랙코미디 또는 풍자극과도 같은 한편 드라마다. 세상은 어리숙하지도 않고, 그저 신문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, 어찌 모두 뒤집어지지 않을쏜가.
“김 판사 전화는 조폭의 ‘딸이 참 예쁘더군요’랑 비슷” 한겨레신문의 한 제목이다. 좀 거칠기는 하지만, 본질을 여지없이 꿰뚫는 비유가 아닌가. 말이 좋아 ‘기소청탁’이란다. 그 전화가 사실이라면, 고상하게까지 들리는 그 ‘법률용어’는 바로 오래 전 그 형사계장 개똥철학의 ‘남 잡아넣어 달라고 청탁하는 것’이다.
친절하게도 검사(검찰)가 기소만 해주면 나머지는 판사(법원)가 알아서 하겠다는 취지의 설명까지 있었다는 얘기가 나온다. 청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‘어떻게 될 것’이라고 특정(特定)한 언급은 물론 없다.
그러나 모를 사람은 거의 없다. 그걸 잘 알고 ‘적절하게’ 행동해야 ‘세상 물정 아는 현명한 사람’ 대접을 받는다. 세상이 그렇다는 얘기다. 그러나 있을 수 있는 일인가? 하늘도 두렵지 않은 사람들이다. 감히.
검사님에 대한 판사님의 ‘기소청탁’이라니... 듣는 것만으로도 찬바람 휘몰아치는 듯한 권력의 이름 (여성)검사님이 마치 구석에 몰린 가련한 신세가 된 것처럼 보이는 이 희한한 드라마의 본질은 무엇인가.
드라마는 계속된다. ‘기소청탁 없었다’ ‘편향 매체의 정치기획’ ‘나경원 죽이기...음해, 성추행과 다름없어’ 등의 제목으로 보도된 그 여성 정치인의 기자회견은 어쩌면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. 그래서 긴박감을 더한다. 할리우드도 탐낼 스토리, 더 어디로 흐르나?
마치 그 여검사에게 ‘이렇게 진술해 주셔야만 할 것’이라고, 또 언론은 왜 그렇게 방정맞게 나서느냐고 말하는 것 같다. 시민에 대한 겁박(劫迫)일 수 있다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? 그게 정치인가? 이제 남편이신 판사님 순서인가?
참으로 오랜만에 당당한 경찰 ‘곽 형사’를 찾고 싶어졌다. 그 ‘신념’은 그의 인생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확인하고도 싶고, 해장국집서 나눈 그 ‘철학’도 다시 함께 새기고 싶다. 박상은 사건 살인범은 여태 오리무중(五里霧中)이다.
강상헌 언론인 / (사)우리글진흥원 원장